preaching & sermon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방언' 이슈로 인해 우리 신앙의 근거가 '체험'에 있는지 '믿음'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삼는다.

 

체험을 신앙의 근거로 -전체이든 일부이든- 삼은 시기는 교회의 역사중 최근 한세기남짓 된다고 한다.

특히 오순절 운동과 아주사 부흥으로 인해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8&command=body&no=30

 

어느때에나 현상이 주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근세에 들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진 것 같기도하다.

이런 시간적 흐름에서 현상을 연구한 것으로는 역시 조나단 에드워즈가 탁월하다.

하지만 그도 결과적으로, 참된 부흥 변호를 위한 도구로서 연구를 하였지, 현상 자체를 주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미 쓰여진 계시인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롭게 다가오는 현상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누군가에게 일어난 현상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부러워하고 기대한다면?

그것이 옳은 신앙인가?

믿음은, '부활'을 목도하고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눅 16:31).

 

정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 삶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현상이 공동체에서 세대를 넘어 지속되게 하라시거나

어떤 체험이 재연되는 또다른 영혼들을 말씀하시는 것도

심지어는 '회심'을 일으키라는 말씀도 아니시다.

 

우리는 영혼의 양육에 있어서 그 어떤 현상이나 체험으로 잣대삼을 일이 없다.

가르친 것을 그대로 지키느냐 하는 것이 주께서 당부하신 바로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의 온전함이다.

 

역사적으로 장로교회는 특히 고백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리문답은 우리가 맞닥뜨릴 일반적인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 아주 건전한 답과 모범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쉽지 않다. 사실이다.

특히 성화를 강조한 - 기존 개혁교회의 교리와 지침을 거부할 정도로 - 요한 웨슬레의

'선별된 신도회'의 높은 성화 수준 지침은 정말로 그러하다.

이러한 가르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문항들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삶에 그대로 실천하느냐의 지점에서

사실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능력, 도우심이 필요하다. 어떤 체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내가 지킬 수 없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불가능한 삶이 살아지는 것을,

성령께서, 또한 끝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주께서 인정하시는 삶의 증거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성화 자체가 증거가 되는 삶이다(조건이 아니다).

(성화되는 기쁨이 구원의 기쁨을 지속한다. - 감리교의 웨슬레)

 

'예배'는 신앙의 표출에 있어서 모든 삶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모범은 교리 문답으로 추상적으로 제시하였으나

예배만큼 현상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려는 열정들을 통해 신앙고백의 예배모범 부분에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예를들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중 예배가 시작되면 회중은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서 목사가 그 때 읽거나 암송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읽지 말고 사사로이 소근대는 것, 이야기하는 것, 인사하는 것, 거기 참석한 사람이나 늦게 들어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말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잠자거나 그런 보기 흉한 행동을 하여 목사나 예배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자기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한 번에 얼마나 읽을 것인가는 목사의 지혜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편리한 대로 보통 신구약에서 각각 한 장씩 모일 때마다 읽을 것이요 장수가 짧거나 그 문제의 연관성이 요구되면 더 읽을 수도 있다. 정경에 있는 모든 책을 순서대로 읽어서 사람들이 성경 전체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니 보통 신구약 어디든지 한 주일에 끝난 데서 다음 주일에 시작한다.』(공중 성경 낭독에 대하여)

 

『교회와 정부의 대학과 모든 학교와 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되, 저희로 배우는 일과 경건에 점점 왕성하게 하옵시며, 특정한 도시나 교회를 위하여 또한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와 치리에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고 사회 행정부와 거기서 일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축복하옵소서 하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고난 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른 일기와 열매 맺는 기한을 필요한 대로 허락하옵소서 하고, 우리가 느끼거나 두려워하거나 이제 받아야 할 심판 즉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 같은 것을 제거해 주옵소서라고 할 것이다.』(설교 전 공중 기도에 대하여)

 

또한, 다른 종류의 고백서의 모범중에는,

공교회의 예배에서 '방언'을-방언으로 명시하지는 않기도 함-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있기도 하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 많은 지켜야 할 교훈들을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다.

공동체의 모임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오랜시간동안 교회는 역사적인 경험속에서 해답을 내어놓았으며,

우리는 이전에 해답을 내린 문제가 아닌 오늘날 세계속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문제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일단은 효과적일 것이다.

 

예수님께 직접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직접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한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의무로 부담지워진 내용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교리를 들춰보고, 우리 앞서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으로 살다간 믿음의 선진들이 일구어 놓은 지혜의 교훈을

한번 따라가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새로운 것을 따라가는 것을 우선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은사주의, 성령세례등은 바로 이런 교리들에 비해 훨씬 후대의 것이다.

교리의 확립 시기에 있어서 애초에 초대때부터 정통에서 거부된 것들도 있다.

 

무엇을 따르겠는가?

현상인가? 체험인가?

아니면 선배들의 모범인가?

확언하건데, 완성된 교회를 소망중에 바라보며 각고의 노력으로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일구어낸 우리 선배들은,

지금 주님 곁에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발견하고 당신들의 삶을 다시 이어가길 분명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영광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소망 가운데 현세를 사는 우리들도 그 성화를 이루어내고

결국 함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구속을 완성하실 그 날까지 나와 우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더욱 힘주시고 세워 붙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Posted by 전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