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 & sermon

서평,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박문재 역, 현대지성(2019).

 

(이 글은 현대지성 서평단 공모에 응모한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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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400년 전에 한 노인의 죽음이 인류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한 권도 친히 저술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오늘 2019년에도 또다시 번역되어 출간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플라톤의 업적에 기초한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변론과 형 집행에서 충격을 받고 이 제자는 그리스 사상의 중심부 아테네를 배경으로 냉담하게 스승을 복원해 나갔던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또 이 노인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2400년 전의 사건에 천착하며 생각을 진전시킨다. 인간은 무엇이고 사회와 공동체는 무엇인가? 그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살면서 따라가야 할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고뇌를 짚어가기에 필요충분한 최소한의 지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등.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마치 인류 전체를 제자로 삼아 오늘도 대화를 이어가는 듯 하다.

 

2019년 11월, 현대지성사에서 박문재 선생을 통해 번역된 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4개의 대화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그리고 '향연'이다. 모두 대화 속에서 생각을 주고받으며 이어나가는 형식이기 때문에 플라톤의 대화편이라 불린다(앞쪽 책날개에는 플라톤의 대화편은 25편이 있다고 한다). 대화편의 특징은 무엇보다 생생한 생동감이다. 확인 질문이나 반문을 통해 반복되고 또다시 강조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실 그 사상만 추려낸다면 더 간결한 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주고받는 대화들이 거추장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저자와 대화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기획은 정말 탁월했고 고맙기까지 하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지인과 제자들이 둘러싼 가운데 대화를 이어가는 그 현장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이번 번역은 고전어를 여러차례 번역하셨던 박문재 선생의 번역이기에 끊김없이 술술 대화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박문재 선생은 인문서적 외에 기독교신학 전문서적과 대중적인 신앙서적 모두 다수 번역하셨다). 누구라도 서점에 선 자리에서 이 책을 펴 읽어본다면, 전혀 생경하지 않을 표현과 문장들을 접하며 정말 매끄러운 번역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이 책에서 2400년의 거리감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각주를 통해 좀더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최소한의 각주는 매끄러운 독서에 기여한 또 하나의 장점이기도 하다. 다른 학문적 역서들은 첫 제목에서부터 긴 각주가 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아가 그런 각주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정보들을 제시하고 있었기에, 대화 자체에 빠져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물론 사건의 배경이나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없이 바로 읽기 시작하는 것은 어리석은 독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균형은 무엇인가? 각주와 별도로 최소한의 정보를 본문 앞 일러두기에서 간략하게 제공한 것이었다.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제공하고 대화로 들어가는 것, 역자 선정과 더불어 이번 출판사의 편집에 또 한번 감사드리는 부분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4개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다. 첫째 '변론'은 악의적인 고발로 인해 아테네 법정에서 500인(또는 501인)의 배심원을 대상으로 소크라테스가 3번에 걸쳐 변론한 내용이다. 첫째 변론은 예로부터 법정 변론 또는 수사학의 주요한 텍스트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변론에서 소크라테스의 사상 뿐만 아니라 논증의 방법과 수사등을 파악하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가지 일관성을 가지고 자신을 변론한다. 특히 델포이 신탁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확신과 그것을 따를 신성한 의무를 강변할 때는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숭고한 정신을 발견하면서 감동받기까지 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혐의를 이 신성한 의무에 종속된 것으로 변호하였고, 나아가 이 신성한 의무를 이어가는 것이 이 도시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이 신성한 의무에 아테네 시민들을 초대하기까지 한다. 아테네가 낳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위대하기 때문에 아테네가 위대해지는 순간이다(이 변론의 효과는 두번째 변론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220명이 무죄에 손을 들어주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위인이 있었고, 그 가운데 더러는 죽음을 초월한 위대한 정신을 보여준 이가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인물들을 우리는 성자라 불러 마지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성자의 반열에서 가장 앞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죽음 앞에 누가 이렇게 당당하게 이상과 시민의 책임을 논할 수 있을까? 사형이 언도된 이후 3번째 최종 변론에서는 파이돈에서 이어질 소크라테스의 죽음학의 전형을 맛 볼 수 있다. 사형을 언도하는 아테네 배심원을 향하여 그것이 자신에게는 형벌이 되지 않는다고 변론하는 모습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함몰된 우리의 시선을 진정한 이상향 곧 지혜를 향해 끌어올리는 숭고한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 대화 '파이돈'은 지혜를 추구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입장에서 죽음은 바로 그 지혜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일임을 논증하며 시작한다. 이 논증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지는 독자의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때때로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무리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대화의 유익은 결코 적지 않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의 자세를 논하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 특히 영혼을 논하기도 하며, 죽음에 관한 논의가 심도를 더하며 인식론으로 이어질 땐, 나는 그야말로 하버드 부럽지 않은 아테네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청강하는 늦깎이 철학도가 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영혼을 충분히 논증했으므로 이제 영혼의 존재 때문에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철저하게 지혜를 사랑하기에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논증한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을 그렇게 맞이 할 수 없기에, 더더욱 이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철학자가 되라고 당부한다. 오욕칠정에 쉴새 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정신이 참된 지혜에 다다르는 길로서의 죽음을, 소크라테스가 말한다. 그가 사랑하는 아테네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그리고 그 판결을 따르는 것이 정의롭다고 여기는 철학자. 정말이지 지나치게 고지식한데다 노망난듯 고집이 고약한 할아버지인 듯 하지만, 그는 진정 철학적 인류 '호모소포스'의 선구자이다.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행한 마지막 철학 강의라고 생각하고 읽기를 권한다.

 

(네번째 대화 '향연'은 생략합니다.)

 

두번째 대화 '크리톤'은, 감금된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친구 크리톤과의 대화를 담고 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강권하려고 찾아왔으나 소크라테스의 논증에 손을 들고 만다. 무슨 대화가 있었던 것일까? 분량이 25페이지로 아주 짧은 이 부분에서 어쩌면 공리주의 이슈의 고대 버전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직접 읽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략하게 덧붙인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소크라테스 혹은 그리스 철학에 관해 먼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변론의 배경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대화라는 생각이 아무래도 몰입하는데 도움이 된다. 2400년 전에 위대한 철학자가 무고하게 사형되었다. 그것도 아테네에서 말이다.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절망을 만약 느낄 수 있다면, 이제 그 감성을 끌어올려 철학에 입문해보자. 나와 가정과 국가 그리고 산적한 인류의 과제들에 대해 예전보다 조금 더 숙고하며 조금 더 길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시민이 되어보자. 그다음 플라톤의 주요 저작을 펼치면서 말이다. 소크라테스 사후 아테네 시민으로서 시민의 철학을 함께 시작하자.

 

Posted by 전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