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aching & sermon

육적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하는 교회들 by Paul Washer

 

제가 청년부에서 보게 되는 것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하지만 전 또한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각기 다른 회중들에서도 그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한다면

여러분은 육적인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인데

여러분은 그들을 교회 안에 붙들어두기 위해서

더 큰 육적인 수단들을 계속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어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큰 교회들이

많은 회심하지 않은 육적인 사람들로 채워지도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 교회들 안에 또한

이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곧 참으로 그리스도를 원하고

참으로 그분의 말씀을 원하고

참으로 변화되길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은

참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와

말씀이 그들에게 선포되어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자, 저는 여러분들에게

미국 목회자의 큰 죄를 말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제게 많은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그 지역 교회에 있는 이 작은 무리의 회심한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이고

그들이 행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그들은 순결을 원합니다.

그들은 진실을 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 다수 무리의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영합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이들 육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육적인 것들로 만족시키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양들을 굶주려 죽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심판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형제여.

만일 제 아내가...

쇼핑하려고 식품점에 가고 있었는데

그녀가 차로 다가가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공격했습니다.

난폭하게 폭행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옆으로 걸어 지나갔는데

당신은 연류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가는 길에 해를 입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저 모든 것이 부드럽게 진행되길 원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난 뒤

전 그 사람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들을 처리하기 위해 말입니다.

하지만 전 당신이 이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 또한 찾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아내를 위해

맞설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신부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보호 본능이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당신은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녀를 공격했던 사람과 똑같이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 전역에 걸쳐

목회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들 모든 교회들에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 중 많은 곳에서, 심지어 다소 이단적으로 보이는

교회들 여기 저기에서도

여러분은 보통 진정 그리스도를 원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지도부는 육적인 자들에게 영합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곤궁한 채 굶어 죽게 합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일이 젊은이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젊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Paul 형제님,

전 형제님의 설교를 줄곧 들었습니다."

전 말합니다.

"당신의 교회는 어떤데요?"

그들이 말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건 다른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줍니다.

전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명의 작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차리리 연자 맷돌을 여러분의 목에 매다는 것이

여러분이 이들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Posted by 전선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방언' 이슈로 인해 우리 신앙의 근거가 '체험'에 있는지 '믿음'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삼는다.

 

체험을 신앙의 근거로 -전체이든 일부이든- 삼은 시기는 교회의 역사중 최근 한세기남짓 된다고 한다.

특히 오순절 운동과 아주사 부흥으로 인해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8&command=body&no=30

 

어느때에나 현상이 주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근세에 들어 더욱 중요하게 다뤄진 것 같기도하다.

이런 시간적 흐름에서 현상을 연구한 것으로는 역시 조나단 에드워즈가 탁월하다.

하지만 그도 결과적으로, 참된 부흥 변호를 위한 도구로서 연구를 하였지, 현상 자체를 주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미 쓰여진 계시인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롭게 다가오는 현상들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래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누군가에게 일어난 현상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부러워하고 기대한다면?

그것이 옳은 신앙인가?

믿음은, '부활'을 목도하고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눅 16:31).

 

정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 삶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현상이 공동체에서 세대를 넘어 지속되게 하라시거나

어떤 체험이 재연되는 또다른 영혼들을 말씀하시는 것도

심지어는 '회심'을 일으키라는 말씀도 아니시다.

 

우리는 영혼의 양육에 있어서 그 어떤 현상이나 체험으로 잣대삼을 일이 없다.

가르친 것을 그대로 지키느냐 하는 것이 주께서 당부하신 바로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의 온전함이다.

 

역사적으로 장로교회는 특히 고백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리문답은 우리가 맞닥뜨릴 일반적인 대부분의 문제에 있어 아주 건전한 답과 모범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쉽지 않다. 사실이다.

특히 성화를 강조한 - 기존 개혁교회의 교리와 지침을 거부할 정도로 - 요한 웨슬레의

'선별된 신도회'의 높은 성화 수준 지침은 정말로 그러하다.

이러한 가르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문항들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삶에 그대로 실천하느냐의 지점에서

사실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능력, 도우심이 필요하다. 어떤 체험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내가 지킬 수 없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불가능한 삶이 살아지는 것을,

성령께서, 또한 끝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주께서 인정하시는 삶의 증거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성화 자체가 증거가 되는 삶이다(조건이 아니다).

(성화되는 기쁨이 구원의 기쁨을 지속한다. - 감리교의 웨슬레)

 

'예배'는 신앙의 표출에 있어서 모든 삶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모범은 교리 문답으로 추상적으로 제시하였으나

예배만큼 현상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려는 열정들을 통해 신앙고백의 예배모범 부분에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예를들면,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공중 예배가 시작되면 회중은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서 목사가 그 때 읽거나 암송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읽지 말고 사사로이 소근대는 것, 이야기하는 것, 인사하는 것, 거기 참석한 사람이나 늦게 들어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말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잠자거나 그런 보기 흉한 행동을 하여 목사나 예배하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자기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남도 못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한 번에 얼마나 읽을 것인가는 목사의 지혜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편리한 대로 보통 신구약에서 각각 한 장씩 모일 때마다 읽을 것이요 장수가 짧거나 그 문제의 연관성이 요구되면 더 읽을 수도 있다. 정경에 있는 모든 책을 순서대로 읽어서 사람들이 성경 전체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니 보통 신구약 어디든지 한 주일에 끝난 데서 다음 주일에 시작한다.』(공중 성경 낭독에 대하여)

 

『교회와 정부의 대학과 모든 학교와 신학교를 위하여 기도하되, 저희로 배우는 일과 경건에 점점 왕성하게 하옵시며, 특정한 도시나 교회를 위하여 또한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례와 치리에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고 사회 행정부와 거기서 일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축복하옵소서 하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고난 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른 일기와 열매 맺는 기한을 필요한 대로 허락하옵소서 하고, 우리가 느끼거나 두려워하거나 이제 받아야 할 심판 즉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 같은 것을 제거해 주옵소서라고 할 것이다.』(설교 전 공중 기도에 대하여)

 

또한, 다른 종류의 고백서의 모범중에는,

공교회의 예배에서 '방언'을-방언으로 명시하지는 않기도 함-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 있기도 하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 많은 지켜야 할 교훈들을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다.

공동체의 모임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오랜시간동안 교회는 역사적인 경험속에서 해답을 내어놓았으며,

우리는 이전에 해답을 내린 문제가 아닌 오늘날 세계속에서 새로이 등장하는 문제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일단은 효과적일 것이다.

 

예수님께 직접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직접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한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한다고 의무로 부담지워진 내용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교리를 들춰보고, 우리 앞서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으로 살다간 믿음의 선진들이 일구어 놓은 지혜의 교훈을

한번 따라가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새로운 것을 따라가는 것을 우선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은사주의, 성령세례등은 바로 이런 교리들에 비해 훨씬 후대의 것이다.

교리의 확립 시기에 있어서 애초에 초대때부터 정통에서 거부된 것들도 있다.

 

무엇을 따르겠는가?

현상인가? 체험인가?

아니면 선배들의 모범인가?

확언하건데, 완성된 교회를 소망중에 바라보며 각고의 노력으로 교리와 신앙고백들을 일구어낸 우리 선배들은,

지금 주님 곁에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발견하고 당신들의 삶을 다시 이어가길 분명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영광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소망 가운데 현세를 사는 우리들도 그 성화를 이루어내고

결국 함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구속을 완성하실 그 날까지 나와 우리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더욱 힘주시고 세워 붙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Posted by 전선민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5780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여 오순절 교단에서 이단으로 추방당한 브랜험과 그 추종자들이 말하는  ‘늦은 비’(the latter rain) 축복과 상관 없다고 말하면서도, IHOP에서는 여전히 종말론적 엘리트주의에 빠져있다. 이스라엘 땅에 내리는 ‘늦은비’에 대해 풍유적 해석을 하여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시에 비밀스럽게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늦은비 운동”에서 강조한 사도와 선지자의 회복이 바로 오늘날 신사도 운동의 근간으로 연계되어 있다. ‘늦은비’ 운동에서 가장 이단적인 교리는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The Manifested Sons of God)이라고 불리우는 참된 교회라고 하는 “승리자들”의 그룹이다.26)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늘의 형체를 받아서 육체 밖으로 마음대로 다니고, 모든 언어를 말할 수 있으며, 종말론적인 이단사상이다.27) 

 

1909년에서 1911 년 사이에 치유의 기적을 강조하던 데이빗 마이랜드 (David Wesley Myland, 1858-1943)가 오순절 부흥운동을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늦은 비” (Latter Rain)가 내린 것이라고 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28) 원래 그는 감리교회 부목사였다가 ‘크리스챤 앤 미션 얼라이언스’(Christian and Mission Alliance)로 돌아섰다가 방언은사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자 오순절 교단으로 가담했다. 농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농작물 수확을 많이 받도록 하시는 축복을 설명하는 용어가 ‘늦은 비’인데, 그가 이런 축복을 교회사에서 이제 마지막 시대에 부어주셨다고 주장하면서, 요엘서 2장 23절을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농작물 재배가 가능하도록 봄철에 내리는 비 (이른 비)가 있었고, 가을철에 내리는 비 (늦은 비)를 통해서 마지막 은혜를 입었다. 마이랜드는 이 용어를 사용해서 사도행전의 오순절은 이른 비에 해당하는 것이요,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일과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은사운동은 늦은 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래서 이 초기 오순절 운동은 방언을 말하는 은사가 회복되었음을 강조했고, 세계 전도를 위해서 큰 능력을 주시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초기에 ‘늦은 비’ 오순절 운동의 주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능을 회복시켰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 신학을 지켜나가려는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령의 세례의 징표로 방언의 은사를 포함시키려는 오순절 교단들을 함께 받아들여서 연합하려 했다. 오순절 교단에서는 ‘늦은 비’ 개념을 거부하고 많은 복음적인 교회들이 믿었던 전통적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확고히 지켜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은 곧 바로 일어난 왜곡과 변절로 인해서 논쟁에 휩싸이고 말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단일성 (Oneness of God)을 주장하는 자들과의 신학논쟁이었다.29) 이들의 주장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요, 아리우스를 따르는 것이며 이미 초대교회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벨리언주의와 다를 바 없다.30) United Pentecostal Church 에서는 하나님은 한분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요,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는 성부로, 능력으로 나타날 때에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에 윌리엄 브랜험 (William Branham, 1909-1965)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31) 브랜험은 전혀 정규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자로서, 삼위일체 신론을 부인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고집하여 오순절 교단에서 이단으로 축출 당했다.32) 오늘날 대부분의 자칭 선지자들아라고 말하는 이들은 바로 극단적인 직통계시파 브랜험의 영향을 입은 제자들이며, 정통교회의 교단이란 ‘짐승의 표시’를 받는 것이라고 하는 망언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부’를 나누고, 자신의 예언자적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치유은사를 발휘하는 등, 제 2차 세계 대전의 불안한 정국에 휩싸인 상황 속에서 곳곳에서 즉각적인 치유사역 집회를 열어서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에게서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한 브랜험은 최근 나타난 “거짓 선지자”의 모델이었다.33) 

Posted by 전선민

마틴 로이드 존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중 p.38

 

 다음으로, 세번째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체험 운동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나는 이것이 오늘날 매우 심각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것은 지난 15년 동안 우리를 압박해 온 대단히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미국에서 시작해 많은 나라들에 파급되었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주의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하필 은사체험 운동을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용어들을 세심하게 정의해야 할 필요에 대한 자각을 희석시키는 경향이 있었고, 현재 그러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의 가르침은 '성령세례'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간혹 방언을 자신들의 표준으로 삼기도 하지만, 대체로 '성령세례'를 내세웁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몇 가지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은사체험 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데이비드 두 플레시스(David Du Plessis)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라 은사체험이라고 진술합니다. 이 말로써 그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지루하고 이론적이고 지식을 앞세운 정통신앙이란 헛것이며, 신앙에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신학은 헛되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감으로써, 신약성경의 진술과 교훈을 거스르는 매우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는 셈입니다.

 혹시 [가톨릭 오순절주의](Catholic Pentecostalism)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읽으셨다면 그 책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책의 주제입니다. 아주 명쾌한 책이지만,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단히 미묘하고 위험한 책입니다. 이 책의 논지는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적 문화적 배경에 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교리를 수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주장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면 그동안 몸담았던 교회를 나와 오순절파 교회에 가입하는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책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다수 오순절파 신자들은 감리교 출신들이었다. 감리교 신자들은 대체로 감정을 중시하고 지식은 중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과도한 감정과 흥분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이 그러하므로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문화적 매개를 통해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톨릭 신자 곧 로마 가톨릭 신자들로서 거대한 교의와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위대한 역사와 성례전적 가르침과 성례전적 삶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릴 필요가 없으며, 다만 오순절파와 연합하되 그들의 문화적 배경만 버리면 된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은 우리에게 전혀 불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성령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성령세례에서 받아야 할 영향은 우리의 교리를 버리고 오순절파가 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위대한 유산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감사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성령세례의 주된 효과가 성모 마리아를 더욱 친밀히 알고 사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그 체험이 미사를 비롯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다양한 교리와 교의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교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리를 믿어도 괜찮고, 감리교 신자여도 괜찮고, 혹은 내키지 않으면 아예 교리 없이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컨퍼런스나 종교집회에서 사실상 교리가 없어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이러한 견해는 믿음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기술하는 일의 중요성을 훼손합니다. 이러한 견해가 복음주의 진영에 들어오거나 이미 들어왔으며, 복음주의 신자들의 입지 전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재검토해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너무나 절박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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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선민

"11월 27일 약간의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의탁했다. 아침, 9시가 거의 되어서 뉴욕을 출발했다. 내가 말할 수 없이 무가치하다는 비통한 심정을 지닌 채 떠나야 했다. 그들은 모두가 나 만큼 더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모든 형제를 깊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 그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어떤 일을 하였다 해도 아무도 나 만큼 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도 많은 죄를 범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아, 빈약하고 무능하고 정욕적이며 비통하기만 한 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성품이여!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압도하여 왔다. 뉴욕에서 말을 타고 30마일을 지나 화이트 플레인스에 이르렀다. 길을 가면서 내 마음은 줄곧 긍휼과 순수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우러렀다. 밤 깊도록 깊은 낙심에 잠겨 있었다."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일기, 1742년

Posted by 전선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회개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비추어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 왜 베드로는 그렇게 긴급했습니까? 제가 이토록 긴급하게 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 모두는 긴급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필사적이어야 합니까? 베드로가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행 3:22~23). 왜 여러분은 회개해야 합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 영원한 멸망뿐입니다. p.501 마틴로이드존스 사도행전강해 #1 '진정한 기독교' 끝.

Posted by 전선민